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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먼지

안녕, 나의 푸켓

by Anchou 2020. 6. 3.

아마도 이것이 푸켓에서 내가 쓰는 마지막 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지난날 나의 한국 생활은 참 많이도 지쳐있었다. 요즘 사람들 말로 번아웃 상태였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니 뭔가 엄청 나이들어 보이지만 아직까지는 30대 청춘이다. 하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만 싶었던 시절에 이곳 푸켓에 발을 들였다.

처음엔 마냥 좋았다. 뜨거운 햇볕도 좋았고 온전히 나 혼자만을 위한 시간도 좋았다.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아도 되니 그것도 좋았다. 특히나 사람간의 부딪힘이 없는 생활이 가장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의 나는 아마도 사람에게 많이 지쳐있었던 것 같다.

이곳에서 나의 일상은 늘 똑같았다.

일이 있는 날엔 전날부터 촬영지 답사부터 소품까지 여러가지 준비를 하고 평상시엔 늘 가는 까페의 똑같은 자리에서 노을이 지는 시간까지 작업을 했다. 저녁 무렵, 간단한 먹거리를 사서 아주 아주 심플한 요리를 해먹고 집에서 운동을 하고, 가끔 밤 또는 새벽 시간에 비치에 나가서 조깅을 하는게 전부였다. 나중엔 밤에 몇 번 바퀴벌레나 쥐, 뱀 등을 마주치면서 집에서 홈트레이닝만 하게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단순한 루틴이었다. 아침과 저녁 메뉴도 일년 내내 같았다. 아침은 샐러드와 오트밀, 저녁은 스테이크와 샐러드.

심플한 나의 일상은 일 년 정도 계속되었다.

가끔씩 훅 밀려오는 그리움과 외로움의 크기는 당시 내가 느끼던 해방감에 비하면 그저 순간의 감정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빠통이라는 지역에서 1년 넘게 살았다. 다시 슬금슬금 사람이 그리워질 무렵 우연찮게 지금의 신랑을 만나게 되었고, 빠통을 벗어나 까투에서 1년 정도를 지냈다.

... 우리는 이곳에서 결혼을 했고, 흘러흘러 교민들이 밀집해있는 지역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과 두루 왕래를 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사람 정취를 느끼는 정도랄까.

또 한 가지, 달둥이라는 털만 뿜뿜 날리고 백해무익한 녀석과도 가족이 되었다.

우리는 비교적 행복했다.

주변엔 늘 좋은 사람들이 많았고, 노을이 예쁘면 바다를 보러갈 여유가 있었다. 매일 밤마다 별을 보면서 산책도 하고 한국에선 보지 못했던 반딧불이 구경도 종종 할 수 있었다. 비가 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잠깐 나가서 내리는 빗소리를 듣기도 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자유롭게 나누었던 것 같다.

때론 행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심지어 언어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에서의 생활은 우리가 느끼는 여유와 자유로움을 위해 늘 감당해야할 몫이라 생각했다. 물론, 매일이 큰 도전같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한국에서라면 느끼지 못했을 억울함과 답답함을 억눌러야 할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푸켓에 처음 왔었던 그때의 나를 떠올리며 지금의 생활 역시 나(지금은 우리)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되뇌었다. 좋지 않은 상황에 떠밀리듯 귀국하고 싶지 않은 오기도 분명 있었다.

이런 감정의 파도가 왔다갔다 하다보니 어느새 7여년이 흘렀다.

그렇게 우리는 작년부터 천천히 귀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준비하다가 멈추다가를 반복하다보니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면서 지금은 가고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어떻게 보면 덕분에(?) 더 적극적으로 귀국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다.

무기한 폐쇄되었던 푸켓에 육로가 열리면서 6월 4일, 그러니까 내일 나는 귀국한다.

약 17시간 차를 타고 방콕으로 가서 방콕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신랑은 달둥이 때문에 푸켓에서 푸켓발 직항이 재운항되길 기다리기로 하고.

돌이켜 보면 분명 쉽지 않은 해외 생활이었지만 깨달은 것들도 많고 행복했던 기억도 가득하다. 특히 신랑과 달둥이와 함께 돌아가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

한국에서의 다시 시작함이 살짝 설레이면서 두렵기도 하다. 빠르고 날 선 패턴에 내가 다시 들어가 적응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삶의 무게 중심을 나에게 두면서 타인의 잣대나 평가에 괴로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푸켓에서의 기억이 앞으로 살아갈 큰 자산이 되길 소망한다. 애증의 푸켓, 이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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